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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시대별 여성 아이콘 - 1920년대: "사의 찬미" 윤심덕. 




: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반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식민지라는 고통스러운 경험 외에도 세계라는 무대에 완전히 노출된 것도 한반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변화였다. 이때까지 닫힌 세계에서 살아왔던 한반도 사람들에게 열린 세계는 혼란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 그런 속에서 여성들도 일대 가치관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우리가 20세기 초반 지식인 여성들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단어, 신여성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 192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신여성은 나혜석을 필두로 하여 김일엽, 김명순 등의 여성 작가군과 음악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낸 윤심덕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 윤심덕은 남다른 생애와 더불어 의문의 죽음으로 인해 당대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어 왔다.






 □ "사의 찬미" 윤심덕은 누구인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윤심덕 (尹心悳, 1897년 07. 25.~1926년 08월 04일)


: 윤심덕 일제 강점기의 성악가이자 가수  배우이다. 화가 나혜석과 함께 1920년대의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 한기주(韓琦柱)와 함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였다.







 □ "사의 찬미" 윤심덕의 파란만장한 일생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호는 수선(水仙)이며 평양 출생.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으며, 강원도 원주에서 1년여 동안 소학교 교원을 한 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성악과에서 수업받았다.


: 1921년 동우회(同友會) 등의 순회극단에 참여하면서 극작가 김우진(金祐鎭)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생활 1년을 마친 뒤, 1923 6월 귀국하자마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하였다.



: 이때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모든 음악회 프로에는 항상 윤심덕을 넣을 만큼 일약 스타가 되었다. 양악이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제대로 성악을 공부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 또한 대중을 휘어잡았다.


: 그러나 정통음악을 가지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사생활과 함께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세미클래식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하였다. 한때 극단 토월회 주역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하였으나 연기력이 없어서 실패하였다.


: 대형 오페라가수를 꿈꾸었던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중가요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꿈꾸었던 예술 조국을 만들기에는 이 땅이 너무 낙후했고 견고한 유교적인 인습은 그녀를 더욱 못 견디게 하였다.




: 특히 유부남 김우진과의 사랑은 진보적인 도덕관을 지닌 그녀를 궁지로 몰아갔다. 1926년 여동생 성진(聖眞)의 유학길 배웅을 위하여 일본에 간 그녀는 닛토(日東)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한 뒤 먼저 와 있던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정사하였다. 그녀가 남긴 ‘사의 찬미’는 오늘까지 널리 불리고 있다.






 

 □ 동반 자살을 택한 "사의 찬미" 윤심덕과 김우진의 스캔들 (출처: 네이버 캐스트)


                                                             <생전의 김우진(좌) 과 윤심덕(우)의 모습>



: 성악을 전공한 그녀 윤심더은 음악적 소질 외에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했으며 큰 키에 목이 긴 서구적인 스타일의 여성이었다. 성격 또한 매우 활달해 왈녀라는 별명이 있었고 당시 일반적인 여성과는 달리 남성들과도 격의 없게 지냈다. 도쿄 유학시절 윤심덕은 한국유학생 남자들과 어울리며 그들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홍난파, 채동선 등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으며 박정식이란 유학생은 윤심덕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하고 상사병에 걸려 정신이상에까지 이르렀다. 그녀의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활달하고 대범한 행동은 오해에서 비롯된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자살에 대한 당시 조선일보 기사>



: 도쿄에서 그야말로 청춘을 구가하던 윤심덕이 김우진을 만난 것은 1921년 일본유학생들이 결성한 순례극단 동우회에서였다. 윤심덕과는 정반대로 김우진은 조용하고 차분한 지식인으로 당시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전라도 거부의 맏아들이었으며 이미 고향에 처자가 있는 몸이었다. 김우진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동우회에 윤심덕이 참여하면서 첫만남을 가진 이후, 한국에서 2달여 간의 순례공연을 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였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자살에 대한 동아일보 기사>


<김우진과 윤심덕의 자살에 대한 당시 동아일보 기사 내용>



: 당시 고향에 처자를 둔 남성과 신여성의 교제는 도덕적으로 당연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실상 비일비재 했다. 조혼의 풍습으로 고향에서 가문이 좋고 고전적인 구시대 여인과 결혼한 후 신식 교육을 받으러 외지로 유학 나온 지식인 남성들은 정서적으로 자신들과 눈높이가 맞는 신여성들에게 빠져들었다. 신여성들 입장에서도 유부남 지식인들과의 교제는 고육지책이었다.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아 자의식이 남다른 신여성들이 만났던 지식인 남성들은 지방 재력가 가문 출신들이 많았고 그들은 대개 일찌감치 결혼해서 신여성들과 비슷한 나이임에도 이미 처자가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게다가 당시 남성들의 차별적 정조관념도 문제였다. 여성들에게는 정조를 강요하면서 남성들은 구시대의 축첩행위를 거리껴 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선호했다. 고향에 둔 아내에게도, 도시에 나와 사귀는 신여성에게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던 것이 당시의 지식인 남성들의 행태였다.


: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배에서 당시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 알려져 유명세를 탔던 윤심덕과 전라도 거부의 아들로 신극 운동에 앞장섰던 김우진이 동반 자살했다는 소식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들의 유품은 윤심덕이 남긴 현금 140원과 장신구, 김우진이 남긴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다였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객실담당 승선원에게 남긴 ‘보이에게’라는 편지에는 돈 5전과 함께 자신들의 유품을 각자의 집으로 보내달라는 부탁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 두 사람의 죽음에 각자의 가족은 그들이 자살을 했을 리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그들이 물에 빠지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죽음을 가장한 다음 이탈리아로 가서 악기점을 하면서 숨어산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상 둘의 동반자살은 확실시되었다. 1897년생,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의 동반자살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번민하던 두 남녀의 극단적 결말로 정리되었다.

 

: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자살에는 구구한 억측과 소문, 황색 언론의 이야깃거리 만들기가 뒤따랐다. 그만큼 윤심덕과 김우진이 당대 유명인들이었고 동반 자살이라는 그 죽음이 너무 자극적이기 때문이었다. 김우진이 처자를 둔 유부남이었고 윤심덕이 노처녀였다는 것도 가십성 기사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특히 살아생전 김우진보다 더 유명했던 윤심덕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갖가지로 비화되었다. 1920년대 이제 막 사회활동의 대열에 참여한 여성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일부에서는 그녀의 삶과 죽음, 치부를 낱낱이 까발리고 싶어했다. 윤심덕이 유부남과의 사랑에 울다가 자살한 이름없는 여인이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서양음악 성악가였다는 사실이 이런 현상을 더 부추겼다.

 







  □ 윤심덕의 투신 자살로 더욱 유명해진 노래 "사의 찬미"



<윤심덕의 "사의 찬미" 가사 내용>


: 1926 7월 윤심덕은 일본 오사카의 닛토레코드회사에서 음반취입을 의뢰받고 일본행을 했다. 그녀의 여동생 윤성덕이 미국유학길에 가는 도중에 윤심덕과 동행했다. 레코드 취입을 다 마친 8 1일 윤심덕은 음반사 사장에게 특별히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고 청했다. 그 곡은 그녀의 대표곡 "사의 찬미"로 요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것으로 한국어 가사를 윤심덕이 썼다. 반주는 동생 윤성덕이 하였다.


: 삶의 허무를 말하는 듯한 가사에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윤심덕의 노래를 듣고 녹음실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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